Philip the Good (1396–1467), also known as 필리프 선량공, was the 3rd Duke of Burgundy and a leading figure who planned and spearheaded the Northern Renaissance. He elevated Burgundy into a European power through political and diplomatic strategy, while fostering a golden age of art and culture by supporting Flemish masters such as Jan van Eyck. By securing a favorable position between England and France and promoting the prosperity of key commercial cities like Bruges, Ghent, and Antwerp, he transformed Burgundy into a center of politics, economy, and culture.
필리프 선량공(Philip the Good, 1396~1467)은 부르고뉴 공국의 3대 공작으로, 북유럽 르네상스를 기획하고 이끈 대표적인 군주입니다. 그는 정치·외교 전략으로 부르고뉴를 유럽 강국으로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를 비롯한 플랑드르 화파를 후원하며 예술·문화의 황금기를 열었습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외교적 우위를 선점하고 브뤼허·겐트·앤트워프 같은 상업 도시의 번영을 이끌어 부르고뉴를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 필리프 선량공 (Philip the Good, 1396~1467)
본명: Philippe III de Bourgogne 필리프 3세 부르고
별칭: le Bon (프랑스어, ‘선량한/좋은/덕이 있는’), 한국어로 선량공
재위: 1419년 ~ 1467년 (부르고뉴 공국 3대 공작)
조부: 필리프 대담공(Philip the Bold, le Hardi) / 부친: 존 공포공(John the Fearless, le Peur)
아버지 존 공포공의 암살과 부르고뉴파의 부상
필리피 선량공의 아버지 존 공포공은 2대 부르고뉴 공작으로서, 프랑스 백년전쟁 시기에 부르고뉴파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프랑스 내 정치 혼란, 아르마냑파 vs 부르고뉴파) 1407년 프랑스 왕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루이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며, 왕실 내 내전이 격화되었습니다. 존 공포공은 플랑드르와 브뤼허, 겐트 등 무역 도시의 부를 이용해 군사력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1419년 프랑스 내전으로 인한 모너로 전투에서 프랑스 왕세자와 휴전 협상 중, 매복해있던 아르마냑파에 의해 암살되고 맙니다.
부르고뉴의 독자 노선과 ‘복수 외교’
아들인 필리프 선량공은 3대 부르고뉴 공작으로 즉위한 후, 아버지의 복수를 명분으로 부르고뉴의 독자 노선을 강화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암살을 “왕세자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프랑스 왕세자(샤를 7세)와 결별하고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와 손잡습니다. 1420년 트루아 조약을 통해 영국 왕 헨리 5세를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면서, 프랑스 왕세자 샤를 7세를 사실상 왕위에서 배제했죠. 이로 인해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와 적대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라스 조약(1435)과 부르고뉴의 독립적 지위 확보
1435년 아라스 조약에서 프랑스 왕 샤를 7세와 화해하면서 부르고뉴의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받게 됩니다. 이 조약으로 부르고뉴 공국은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해체하고, 잉글랜드를 고립시킵니다. 덕분에 프랑스가 백년전쟁 후반에 주도권을 자리잡을 수 있었고, 부르고뉴 공국은 사실상 독립적인 강국으로 자리잡습니다. 하지만 화해시점까지 15년간 “복수”를 명분으로 상업도시 플랑드르의 부와 군사력을 동원해 정치적, 군사적 행보를 이어가며 북부 프랑스까지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황금양모 기사단 창설(1430)
1430년에는 황금양모 기사단(Order of the Golden Fleece)을 창설하였습니다. 부르고뉴와 포르투갈 왕실 혼인을 기념한다는 명분이었지요.
아래 필리피 선량공의 초상화에서 기사단 목걸이를 착용한 모습입니다. 이 기사단은 1430년 1월 10일, 영국의 가터 기사단(Order of the Garter)을 모방하여 설립되었습니다. 그는 가터 기사로 초청받았으나,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를 불쾌하게 만들까 우려해 이를 거절했습니다.
기사단 상징은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에서 비롯됩니다. 영웅 제이슨이 아르고호 대원들을 이끌고 황금 양털 가죽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황금 양털은 용이 지키는 나무에 걸려있었죠. 기독교 기사단에 이 이교도 상징을 쓰는 것은 논란이 되었지만, 이 전설이 지닌 기사도적 의미가 필리프 공작에게 강하게 어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 전설을 여러차례 그림으로 제작하게 했습니다.

이 초상화의 공식적인 유화 원본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로저 판 데어 웨이던((Rogier van der Weyden)이 그린 원본을 본뜬 일종의 패턴북입니다. 로저 판 데어 웨이던의 대형 작업실 중 한 화가가 그린 것으로 보이며, 감정표현이 없는 이상화된 군주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초상 원본은 아마도 혼인용 두 폭 제단화의 일부였으며, 다른 한 폭에는 1430년 필리프와 결혼한 그의 세번째 부인 포르투갈의 이사벨라의 초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포르투갈 왕녀 이사벨라와의 결론
1430년 포르투갈 왕녀 이사벨라와의 결혼운 포르투갈과 부르고뉴 간 무역, 외교 관계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결혼에 궁정화가 얀 반 에이크가 큰 활약을 했습니다. 당시 얀 반 에이크는 궁정화가이자,varlet de chambre(궁정 시종 직함, 사실상 왕의 개인 비서급)로 활동했습니다. 1428-1429년 얀 반 에이크는 포르투갈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이사벨라 왕녀의 초상화를 그리며, 비밀 외교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 정치·외교 업적
- 부르고뉴 영토 확장
- 부르고뉴 가문은 원래 프랑스 동부(디종 중심)의 영토만 가졌지만, 결혼과 상속을 통해 플랑드르(Flanders), 브라반트(Brabant), 홀란드(Holland), 젤란드(Zeeland) 등 현재 벨기에·네덜란드 핵심 지역을 손에 넣었습니다.
- 필리프는 특히 북해 연안 상업 도시들을 장악해 유럽 무역의 요충지를 거머쥐었습니다.
- 백년전쟁에서의 외교술
- 잉글랜드·프랑스 사이를 오가며 동맹과 중립을 조정해 부르고뉴의 이익을 극대화했습니다.
- 이 덕에 부르고뉴는 전쟁 피해를 최소화하고 상업 번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 경제·상업의 부흥
- 브뤼허(Bruges), 겐트(Ghent), 앤트워프(Antwerp) 같은 도시가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였습니다.
- 모직물 산업, 금융업, 해상 무역이 크게 발전해 부르고뉴 궁정은 막대한 세수를 확보했습니다.
🎨 예술·문화 후원 업적
필리프 선량공(Philip the Good, 1396~1467)은 정치·외교뿐 아니라 예술·문화 후원 면에서도 부르고뉴를 북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든 인물이에요.
얀 반 에이크를 비롯한 플랑드르 화파의 번영도 사실 이 사람 덕분이 큽니다.
1. 부르고뉴 궁정을 ‘유럽 문화 허브’로 만든 장본인
- 당시 프랑스·이탈리아 못지않게 화려한 궁정 문화를 조성.
- 궁정은 음악·미술·문학·연회 예술이 결합된 종합 예술 무대로 변모.
- 궁정 예법·패션·예술품이 유럽 상류층의 트렌드를 주도.
2. 화가 후원 – 플랑드르 화파의 황금기
-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 궁정화가 겸 외교관으로 고용 (고연봉·특권 보장).
- 안정적 창작 환경과 국제적 교류 기회를 제공.
- 로히어르 반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등 북유럽 화가들의 활동 무대를 넓힘.
- 유화 기법·세밀한 사실주의·상징주의가 결합된 플랑드르 회화의 절정을 가능하게 함.
3. 음악 – 부르고뉴 악파(Burgundian School) 탄생
- 귀욤 뒤파이(Guillaume Dufay), 질 방쇼(Gilles Binchois) 같은 작곡가 후원.
- 성악과 기악을 결합한 초기 르네상스 음악 발전.
- 부르고뉴 악파는 이후 프랑스·이탈리아 음악에 큰 영향을 줌.
4. 문학·서적 후원
- 필사본 장식(illuminated manuscripts) 제작을 장려.
대표 예: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와 같은 사치스러운 기도서들. - 시인·역사가들을 궁정에 초청해 부르고뉴 연대기 등 역사서 편찬.
5. 국제적 예술 교류
- 외교 사절·결혼 동맹을 통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북유럽 예술의 교차를 촉진.
- 포르투갈, 스페인,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의 예술가들이 부르고뉴 궁정을 방문.
-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원근법·고전주의와 플랑드르의 사실주의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음.
6. 예술가 ‘전속 계약’ 제도
- 단발성 의뢰가 아니라, 궁정 소속으로 장기간 고용.
→ 예술가들이 생계 걱정 없이 실험적·정교한 작품 제작 가능. - 얀 반 에이크의 경우, 왕녀 초상 제작과 같은 외교 임무도 수행하며 궁정의 신뢰를 얻음.
정리하자면
필리프 선량공은 단순히 작품을 사주는 후원자가 아니라, 정치·외교·경제의 힘을 문화 예술에 집중 투자하여 ‘북유럽 르네상스’의 토대를 만든 기획자였어요.
이 덕분에 15세기 플랑드르(브뤼허·겐트·브뤼셀)는 유럽 예술의 심장부가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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